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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빈 대사범, 한 사람의 삶이 곧 태권도 현대사의 한 장면이 되다

강릉에서 춘천·월남·사우디아라비아·미국까지… 태권도 세계화의 현장을 걸어온 70년 무도 인생

 

[한국태권도신문] 태권도의 역사는 몇몇 유명인의 기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낯선 땅에 태권도를 전하며 세계무대에서 지도자와 심판으로 활동한 수많은 선구자들의 삶이 모여 오늘의 태권도를 만들었다.

 

이의빈 대사범의 삶은 바로 그러한 태권도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1941년 5월 3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감자바위’라고 소개한다. 서울 일신국민학교에 다니다 6·25전쟁을 맞았고 피난 생활을 거쳐 부친이 사업의 터전을 마련한 춘천에서 성장했다. 춘천중학교와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해 1963년 졸업했다.

 

젊은 시절 그가 품었던 좌우명은 ‘문무의 겸비’였다. 학문과 무예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겠다는 마음이었다. 훗날 본인은 “돌이켜보면 죽도 밥도 안 된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법학도에서 군인으로, 조종사에서 태권도 교관으로, 해외 태권도 보급자와 국제심판으로 이어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생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의빈 대사범이 태권도에 입문한 것은 1956년, 춘천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강원도에 태권도가 처음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그는 청도관 김성재 사범의 문하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57년에는 당시 육군 대위이자 5단이었던 남태희 사범에게 심사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에는 육군보병학교와 육군포병학교를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육군항공학교 조종반 제38기를 수료하며 육군 조종사가 됐고, 보병 제1사단에서 복무했다.

 

그가 군 조종사로 근무하던 시절인 1968년 1월 21일,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발생했다. 이의빈 대사범은 관측장교를 태우고 대간첩 작전에 투입돼 현장을 공중에서 관측했다. 당시 바위 뒤에 은신한 무장공비들을 발견했고 지상에서는 1사단 15연대 병력이 산을 포위하는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직접 병사들을 독려하며 앞장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다. 이의빈 사범은 헬리콥터를 선회하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

 

그러나 그해 그의 인생은 다시 태권도와 결정적으로 만난다.

 

육군본부에서 월남에 파견할 태권도 교관을 선발한다는 지시가 내려왔고 전군의 고단자들이 응심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태권도인들이 육군본부에 모였고 이의빈 대사범 역시 선발시험을 거쳐 합격했다. 그는 어렵게 얻은 육군 조종사의 길을 내려놓고 태권도 교관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선택했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조종사 윙을 떼고 월남으로 향했다.

 

첫 번째 파월은 1968년 10월 1일부터 1970년 12월 24일까지였다. 이어 1971년 8월부터 1973년 3월 10일까지 두 번째 월남 근무를 이어갔다. 두 차례에 걸친 파월 기간은 모두 3년 6개월에 달했다.

 

그 기간 동안 이의빈 사범은 고재천, 김봉식, 정병길, 김승규, 유형선, 홍금식 등 여섯 명의 태권도 교관단장을 모시며 월남 현지에서 태권도 보급과 교육에 헌신했다. 그의 활동 무대는 폭넓었다. 월남군 제3군단과 비엔호아 경찰국, 미군 헌병대 등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지도했고 이후에는 월남 대통령 경호실인 독립궁 경호실 교관까지 맡았다.

 

김승규 단장 시절에는 교관조장과 시범조장을 비롯해 대통령 경호실 교관이라는 중책을 수행했다. 또한 김승규 단장을 모시고 시범단을 이끌어 당시 크메르공화국을 방문, 론놀 대통령 앞에서 태권도 시범을 펼쳤다. 이때 김승규 단장은 크메르 금성무공훈장을, 이의빈 사범은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월남에서의 태권도 교관 활동은 단순한 무술 교육에 그치지 않았다. 군과 경찰의 교육, 시범을 통한 태권도 보급과 국위 선양, 대통령 경호 인력 교육 등 다양한 임무가 이어졌다. 그는 월남어 통역관 시험에도 합격할 만큼 현지어에 능통했으며 영어와 월남어를 활용해 현지 사회와 폭넓게 교류했다.

 

파리평화협정 이후 연합군의 철군이 시작되면서 그의 월남 생활도 마무리됐다. 1973년 3월 10일, 그는 주월 한국군의 마지막 철군 제대 편으로 귀국했다. 그해 9월 30일 대위로 전역한 그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입사해 3년간 근무했다. 이후 보다 활동적인 삶을 선택해 대림산업 공채에 합격했고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다란(Dhahran)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또 한 번 태권도 역사와 만난다.

 

다란에는 당시 석유, 광물 분야의 전문 인재를 양성하던 석유공과대학교가 있었다. 이의빈 대사범은 이곳에서 태권도를 지도하며 대학 체육학부 교수로 임명됐다. 단순히 태권도를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태권도를 학점으로 인정받는 정규 교과목으로 개설했다.

 

그는 또한 현지 태권도 조직에 ‘태권도’라는 명칭과 체계를 정착시키는 데 힘썼다. 이의빈 대사범의 이러한 활동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태권도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리는 초기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년 후 그는 대림산업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지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에도 사우디 태권도계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가 시작한 대학 태권도 교육은 후배 지도자들에게 이어졌고 사우디 국가대표팀 역시 한국인 지도자들의 참여를 통해 발전의 기반을 다져갔다.

 

군인과 조종사, 월남 태권도 교관,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태권도 보급자로 이어진 그의 인생은 이후 국제심판의 길로 이어졌다.

 

이의빈 대사범은 1974년 국제심판 2기를 수료하고 국제심판 자격을 취득했다. 국제심판 번호는 02-0069. 당시 번호는 수료 성적에 따라 부여됐으며 그의 기수는 0067번부터 시작됐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태권도 경기 심판으로 선발돼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했다. 서울올림픽 이후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샌버너디노에 Tae Kwon Do Training Center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미국 사회에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그의 제자들은 변호사, 의사, 경찰, 형사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하버드 법학대학원을 졸업한 변호사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에게 태권도는 단순히 경기력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수단이 아니었다. 태권도를 통해 사람을 성장시키고 제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교육의 장이었다.

 

1995년 9월 16일에는 대한민국 제132회 합동심사에서 태권도 9단 심사를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장으로 정도관의 이용우 관장이 참여했으며 청도관의 박해만 관장과 무덕관의 황춘성 관장 등이 심사위원으로 함께했다. 1997년에는 이상철 회장의 추천으로 당시 미국의 태권도 대표 조직이었던 USTU(United States Taekwondo Union)​에서 심판 분야의 중책을 맡았다.

 

이의빈 대사범은 미국 전국의 심판 교육을 비롯해 미국 전국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선발전, 올림픽 지역 선발전과 국제대회 참가 등 미국 태권도 심판 행정과 교육의 중심에서 약 7년간 활동했다.

 

2000년에는 국제심판 1급에서 특급으로 승급했고 국제태권도연맹으로부터 국제심판 훈장을 받았다. 2003년에는 USTU 회장의 추천으로 미국올림픽위원회로부터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열린 팬아메리칸게임 미국 태권도대표팀 단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020년 3월,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캘리포니아주의 영업 제한 조치로 오랜 세월 운영해 온 도장의 문을 닫게 됐고 이후 다시 문을 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은퇴의 시간을 맞았다. 2026년, 85세가 된 이의빈 대사범은 이제 현역에서 한발 물러나 후배들이 이끌어가는 태권도계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분명하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영원히 존속하고 동시에 무도로서도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

 

1956년 춘천에서 태권도를 시작한 한 소년은 군인이 됐고 육군 조종사가 됐다. 이후 월남전의 현장에서 태권도 교관으로 3년 6개월을 보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태권도를 교육과정 속에 정착시키며 새로운 땅에 태권도의 씨앗을 심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국제심판으로 활동했고 미국에서는 도장을 운영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이어 미국 태권도계에서 심판 교육과 주요 대회 운영, 국가대표 선발과 국제대회 참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군인이었고 조종사였으며 태권도 교관이었다. 해외 태권도 보급자였고 국제심판이었으며 교육자이자 지도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태권도가 세계 곳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던 시기에 누구보다 먼저 낯선 땅으로 향했던 선구자였다.

 

화려한 직책이나 명예를 앞세우기보다 맡겨진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했고 중요한 자리조차 극구 사양할 만큼 겸손한 성품으로 주변의 존경을 받아왔다. 미국 태권도계에서 심판 분야의 책임자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에도 그는 처음에는 자리를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인격과 경륜을 높이 평가한 주변 인사들의 거듭된 요청 끝에 결국 그 역할을 맡았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원할 때 오히려 자리를 사양했던 사람. 그러나 한 번 맡은 일에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태권도가 필요한 곳이라면 전쟁터도, 사막도, 낯선 미국 땅도 마다하지 않았다.

 

강릉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태권도를 시작한 한 소년의 발걸음은 월남의 전쟁터를 지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으로 이어졌고, 다시 서울올림픽의 경기장을 거쳐 미국 태권도계의 중심으로 향했다.

 

한 사람의 삶이 곧 태권도 세계화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긴 역사 속에는 언제나 태권도인 이의빈 대사범이 있었다.

 

프로필 사진
남궁윤석 대표 겸 발행인

○약 력
-태권도 9단
-태권도장 운영(36년)
-국기원 감사(전)
-국기원 상벌위원장(전)
-태권도9단회 상임이사(전)
-서울특별시 은평구태권도협회 2대, 3대 회장
-서울특별시 은평구생활체육회 2대, 3대 회장
-서울특별시 은평구의회 4대, 5대 의원(행정복지위원장. 운영위원장. 부의장)

태권도 인으로서 국기원 및 태권도 관련 단체를 비롯한 각 분야별 또는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우수사례는 물론 사건, 사고 등을 전 세계 태권도인과 국민들에게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책임과 소신으로 거침없이 집중 취재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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