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태권도신문] 김운용스포츠위원회 위원장 겸 KOREA 태권도 유네스코 추진단에서 강한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최재춘 단장을 만났다. 최재춘 단장은 태권도 외길 인생 60여 년을 걸어오며, 국내외 수많은 태권도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태권도를 단순한 무도가 아닌,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나아가 전 인류가 함께 향유할 세계 무형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KOREA 태권도 유네스코 추진단은 국내 유관 기관과 협력하여 태권도의 문화사적 가치, 전통성, 공동체성 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고 있는 민간 단체이다. 태권도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문화와 철학, 공동체적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국제사회에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다양한 컨퍼런스, 역사 사진전, 등재 기원대회, 챌린지 행사 개최하고 있다고 최재춘 단장은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은 각국 유네스코 관계자들과의 긴밀한 네트워킹과 외교적 협력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러한 국제적 공감대가 등재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재춘 단장은 2012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의 유산 발굴 과정에서 국기 태권도가 법률로 지정되어
[한국태권도신문] 어린 시절 도복을 입고 처음 도장 바닥을 밟은 그날부터 손민호 대표의 삶은 언제나 태권도와 함께였다. 선수로 전국을 누비며 수많은 시합에 출전했고, 끊임없는 훈련과 도전 속에서 정신력과 기술을 갈고닦았다. 그는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자연스럽게 코치로 전환했고 후배들을 지도하며 기술 이상의 가치를 느끼게 되었다. “태권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교육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손 대표를 기술 지도자에서 진정한 교육자로 변화시켰다. “화려한 경기장에서의 박수보다 도장에서 아이들과 호흡하며, 그들의 삶을 바꾸는 일이 훨씬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경기에서 이기는 법이 아니라, 인생을 이기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손 대표는 선수로서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적 커리큘럼을 재구성했다. 인성교육, 가정교육, 리더십 등을 접목한 프로그램을 직접 설계하며 예건YTS 태권도장을 설립했다. 이곳은 단순한 체육시설이 아닌, 체계적인 상담 시스템과 성장 추적, 학부모와의 소통까지 갖춘 진정한 태권도 교육기관이다. “예건YTS는 ‘누구나 보내고 싶지만 아무나 다닐 수 없는 도장’이라는 철학을 지키며, 아이 한 명 한 명을 끝까지 책임지는 교육을 실천하고 있습
[한국태권도신문] 젊은 시절 사회활동이 왕성할 즈음에 태권도의 소중한 인연으로 만나 약 5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 번함 없고 허물없는 절친한 관계로 노령의 나이에도 인생을 즐기고 있는 김중영(9단) 회장과 전창식(9단) 고문을 만났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보면 평소에는 만만하게 보일 만큼 여리고 약하며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나 내면에는 잠재된 강인함을 가진 소유자로서 겸손함은 물론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동시에 갖추고 있고 소신과 지혜로운 면을 가져 많은 태권도인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지니고 있다. 김중영 회장은 1942년 충남 서천 출신으로 1953년 6.25 동란이 끝난 후 12살 나이에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 청량리 창무관에서 태권도를 시작하였으며 전창식 고문은 1942년 서울 종로 출신으로 해방 이후 어머니의 고향인 경기도 김포군으로 이사를 하고 1957년 서울 영등포 무덕관에서 태권도를 시작했다. 김중영 회장은 태권도를 배우며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중학교 나이부터 책 장사를 하면서 수련비와 학비를 마련하고 책과의 인연으로 고등학교 진학 후 어린 나이에 형의 명의를 빌려 오성출판사의 사장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사업은 이어오고 있다. 또한
[한국태권도신문] 국기원 기술심의회 의장으로서 각종 경기, 심사, 심판 등 2025년도 기술 분야를 책임지고 세계태권도본부를 이끌어가게 될 박광일 9단 대사범을 만났다. 평소 박광일 의장은 자신의 주장이 뚜렷하고 모든 일에 솔선수범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의욕이 충만하고 정의롭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마음과 꾸밈없이 태권도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박광일 의장은 1970년대에 육군 대표 태권도시범단과 선수생활을 시작으로 시범 활동은 물론 각종 대회에 입상하면서 태권도계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는 서울 창일태권도장을 개관하고 수련생 지도에 열성을 다하여 학부모는 물론 수련생들에게 인정받았으며 지역사회에서는 태권도 사범으로서 귀감이 되는 지도자로 손꼽히던 시절이었다며 주변의 동료 지도자들의 칭찬이 대단하다. 특히 태권도의 전문성으로 전국대회 심판 활동은 물론 1978년도부터 서울 장안초등학교, 서울 세종초등학교, 서울 세종고등학교, 서울 경수중학교에 연이어 태권도부를 창단하고 지도사범으로서 태권도 저변확대에 한몫을 해낸 태권도계에 큰 인물이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 동안 세계태권도연맹 국제 심판 자격을 취득
[한국태권도신문] 대한민국 태권도계에는 지도자로서 선수들의 안정을 위한 심리 치료 분야에 매우 뛰어나고 야심 찬 포부로 정신적, 기술적으로 우수한 선수 육성을 선도할 김종호(39세) 사범이 있다. 어린 시절 정신적으로 나약했던 김종호 사범은 자신감 있게 성장을 원하는 부모님의 생각과 권유에 따라 여섯 살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태권도장에 입문했지만 수련 도장의 어색함과 다른 수련생들의 태권도 수련 모습에 심리적 두려움으로 수련 시간의 재미는커녕 눈물로 대신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러나 태권도장 관장님과 사범님의 배려 속에 따뜻하게 맞이해주신 덕분으로 김종호 사범의 태권도 인생은 소중한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여 성장하면서 자신감 넘치고 예절 바르며 태권도의 기술을 익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순탄하게 변모하게 된다. 서울 동성고등학교 선수 시절에는 경기 때만 되면 극심한 긴장감과 불안함으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중요한 경기일수록 심리적 압박감은 더욱 거세져 도저히 경기에 임할 수 없었다는 당시 상황의 안타까움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김종호 사범은 선수 시절 경기장에 서면 어떻게 경기를 준비해야 할 지 어떻게 경기를 마지막까지
[한국태권도신문] 1957년 태권도에 입문하여 68여 년 태권도의 인생과 35년의 교직 생활 속에 정의로운 사범의 모습으로 절대 야합 없이 빈틈 없는 생활을 하시면서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긍정적인 생각으로 경남태권도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이종호 원로사범을 각종 행사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이종호(80세, 9단) 원로사범은 1945년 2월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이고 아호는 백산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도 시간에 붓과 인연을 맺어 1984년 1월 본격적으로 수학하여 풍문 서실에 입문하였으며 덕곡 정도일 선생님을 3년 동안 스승으로 섬기고 고, 송포 최명환 선생님을 30년 동안 스승으로 섬기며 성장하였다. 12살 때 태권도와 인연을 맺었다. 1964년에는 당시 스승인 한무관 중앙본관 이교윤 관장의 가르침으로 대구 칠성동에 위치한 한무관 경북 본관의 사범이 되었다. 1966년 11월 23일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 식전 행사에서 12명의 태권도 시범단을 구성하여 고난도 기술과 위력격파 등 시범을 보여 학장과 교수 진을 비롯하여 전교생으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1968년도에는 월남 참전 십자성부대 제62헌병중대 소속으
[한국태권도신문] 재중국동북3성스포츠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이주호 회장은 중국 전역에 태권도 보급과 세계화를 위해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중국 대련에 위치한 카이더 허핑광장에서 20년째 계명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회장은 얼마전 세계스포츠위원회 해외지부인 재중국동북3성스포츠위원회 수장을 맡고 있으며, 또한 한인 태권도 사범들로 설립된 재중국 동북3성태권도협회장직도 맡고 있다. 이회장의 태권도에 대한 사랑과 뜨거운 열정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두달에 한번씩 전체 공개심사를 개최, 도장 원생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하루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3파트로 나누어 심사하며 하나의 축제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이어지는 공개심사는 많은 학부모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겨루기, 품새, 태권도시범, 격파, 줄넘기, 쌍절곤 등 여러 이벤트적인 심사구성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그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여러 국제오픈태권도대회에 참가해 중국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와 태권도 종주국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그는 거의 신적인 존재이다. 그의 태권도 열정을 고스라니 중국인들에게도 전달되는 것은 물론, 그 만큼 이회장의 노력
[한국태권도신문] 1969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의 수도 쎄크라멘토에 거주하면서 한 평생 태권도장을 운영하며 제자 육성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다 업무차 한국에 방문한 태권도 무덕관 이종환 관장을 만났다. 현재 83세의 나이로 태권도인의 길을 걸어오면서 그동안 다듬어 온 인성과 체구는 나이답지 않게 젊음이 넘쳐났으며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우면서 매우 당찬 태권도 지도자 그대로였다. 더욱 특별한 것은 미국에서 오랜 세월 동안 몸담고 제자들을 지도해 온 이종환 관장은 본인이 태권도 무덕관 중앙관장이라고 밝히면서 임명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직전 관장인 전재규 무덕관 관장이 살아 계실 때인 2019년 6월 1일 이종환 관장에게 임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종환 관장은 전 세계의 무덕관 중앙관장으로 미국에서 태권도 지도자로 활동하며 미국은 물론 유럽 국가 속에 태권도 무덕관 출신 관장이나 사범들의 모임체를 구성하고 태권도 발전과 친목 도모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020년 10월에는 이종환 중앙관장의 주관으로 무덕관 창립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네바다주 리노에서 750여명의 무덕관 가족이 모여 성대한
[한국태권도신문] 평소 나약한 아이가 태권도를 배우면서 강인해지고 부모는 물론 할아버지(박우철)에게까지 효자로 변신한 태권소년 박찬서(10세)를 만났다. 말 한마디가 똑똑하면서 야무지며 얼굴 또한 귀엽고 건강하다. 박찬서 태권소년은 경기도 고양시 마두동에 살고 있었으며 초등학교 3학년으로 2년 넘게 태권도를 배우면서 친구들과 관계도 좋아 인기 또한 만점이다. 필자는 유난히 밝은 표정으로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찬서를 고양시태권도협회가 주관한 국기원 승품단 심사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찬서에게 특히 애정이 많은 찬서 할아버지는 평소 찬서가 매우 어리고 약해서 태권도장에 보냈다고 말한다. 이제 만 2년이 지나니 제법 태권도 동작에서도 자신감이 넘친다고 한다. 또한 찬서는 태권도를 배우면서 약한 모습이 강한 모습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고 자기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스스로 하기 때문에 참으로 대견스럽다고 말하면서 태권도장은 신기한 마법의 비밀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 같다며 웃음을 짓는다. 찬서의 태권도 실력은 물론 성격과 건강이 무척 좋아지게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천서가 다니는 태권도장을 확인해 보았다. 고양시 ○○동에 위치한 국가대표 휘트니스 태권도장으로
[한국태권도신문] 경기도 고양특례시에 위치한 한국체대 꿈나무 태권도장(관장 소천섭)에는 태권 소녀 김소진 수련생이 고양특례시태권도협회와 지역사회는 물론 태권도장이나 가정에서 모범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김소진 수련생은 초등학교 1학년(8세) 시절부터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한국체대 꿈나무 태권도장에 입관하여 2024년 1월 현재까지 8년 동안 꾸준히 태권도를 수련해 오면서 끈기 있고 실력 있는 수련생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영어 회화 능력이 수준급이며 공부도 매우 잘하고 인성이 뛰어나 주변에 친구들은 물론 선배와 후배와 동료 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인기가 많다. 일상생활의 모든 일에는 솔선수범하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인 수련생으로 공부와 태권도를 병행하며 잘 소화해내고 있다. 학업 또한 열중하여 늦은 시간에도 수업을 마치면 태권도장에 출석하고 태권도 수련을 통하여 정신력 강화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은 물론 건강관리에 힘쓰고 있다. 한국체대 꿈나무태권도장 소천섭 관장은 “김소진 수련생의 태권도 수련은 일반적인 수련을 넘어 선수급으로 무척 힘든 과정 속에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수련에 임하는 모습은 아무나
[한국태권도신문] 김신호 사범(태권도 9단)은 6, 25 전쟁 휴전 1년 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강원도 3개 도의 접경지역 오지 중에서도 오지인 소백산 자락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생후 75일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세 살인 누나 그리고 여섯 살 된 형과 그는 새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성이 다른 동생이 다섯 명이나 태어났다. 새아버지는 동네 부잣집 머슴이었다. 김신호 사범은 동생들을 업어 키우느라 초등학교 등교를 반도 못했다. 겨우 초등학교를 마치고 동네 아이들은 모두 중학교 진학을 하는데 그는 부잣집에‘소년머슴’으로 가야 했다. 당시 ‘청년머슴’은 1년 새경이 쌀 다섯 가마니였고, ‘소년머슴’인 그는 쌀 한 가마니였다. 친구들이 하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닐 때 그는 지게를 지고 삽을 들고 논과 밭으로 일하러 가야 했다. 머슴은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을 해야 했으며 1년 동안의 머슴을 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윗목에서 호롱불에 이를 잡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집에서 머슴으로 1년 더 보내 달라고 한다며 올해는 쌀 두 가마니를 준다고 하더란다. 그는 그날 저녁 이불속에
[한국태권도신문]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무척 가난하여 신문팔이를 해야만 했고 학교에는 밥이 담긴 도시락 대신 누나가 챙겨주는 고구마로 점심을 해결하며 태권도를 통한 불굴의 투지와 강한 정신력으로 성장하여 태권도 사범과 경찰학 박사가 된 오용훈 교수가 있다. 오용훈 교수는 어릴 적부터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한없이 솟아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보급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신문배달로 번 돈으로 충남 예산에 있는 태권도장에 등록하여 평소 하고 싶었던 태권도를 수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요즈음 수련생들은 자신이 태권도를 하고 싶어 부모님을 설득하는 경우도 일부는 있지만 어린 아이가 신문배달로 수고한 돈을 모아 태권도 수련비를 납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오용훈 교수는 어릴 적 신문배달이 무척 어렵고 중노동이었지만 항상 밝은 모습으로 일을 하면서 나중에 크면 태권도 사범도 되고 경찰관도 되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항상 즐겁고 자신감은 더욱 충만했다. 오용훈 교수는 군복무를 마치고 태권도 사범의 꿈을 이루었으며 서울에 있는 강덕초등학교 태권도 선수단에서 사범으로 재직시절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특수